1970년대 민족문학의 기수 김남주(1946~1994)
김남주는 1946년(실제로는 1945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서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식민지 농사꾼의 아들로서 설움과 억압을 겪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30년간을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싹싹하게 일을 잘하는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 주인집에서 한쪽 눈이 불편했던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키면서 그의 아버지는 처음으로 땅을 가져보았다. 이에 그는 후일 자신의 핏속에는 알게 모르게 어떤 인간적인 권리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에 대한 애정이랄까 안타까움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와 반면에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종살이시켰던 대상과 그런 사회에 대한 어떤 악감정, 이를테면 적개심 같은 것이 자신도 모르게 어렸을 때부터 몸속에 흐르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철이 들면서 그것이 의식적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해방이 되던 해에 태어난 김남주 역시 지독한 가난 속에서 학업과 농사일을 병행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일평생을 농사일밖에 모르는 촌부(村夫)로 공책이란 공책은 다 찢어 담배 말이 종이로 태우고 학교에서 받아온 상장 종이가 빳빳하고 좋다는 이유로 모조리 씨앗봉지를 만들어 횃대에 매달 정도였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던 김남주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면서기, 군서기나 순사가 되어 당신의 원통함을 갚아주고 당신의 땅을 온전히 지켜줄 것을 소원했다. 그가 기억하는 고향은 ‘양복쟁이’가 나타나면 아수라장이 되는 마을이었다. 불법으로 솔가지를 꺾어 불을 지핀 것이 발각이 되던지, 밀주를 피해 술을 담갔건 것이 들키던지 농민들은 어찌되었건 그들을 자신들로부터 뭔가를 가져가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잘못된 것이 들키면 돈과 술과 씨암탉으로 무마시키며 주머니의 것을 모조리 꺼내놓아야 했기에 마을 사람들은 양복쟁이를 두려워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추곡수매(秋穀收買)에 퇴짜를 당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남주에게 연줄과 돈으로, 나락을 검사하는 사람들에게 술 한 잔을 사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거라 한탄하며 좌절한다. 그는 그런 아버지의 소달구지를 말없이 뒤에서 밀며 정치적인 사안에 관여하며 대학조차 졸업하지 못한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답답하고 참담했음을 느낀다.
김남주는 삼화초등학교 졸업 후 광주로 갈 생각으로 중학교 시험을 보았으나 장학생이 되지는 못했다. 재정적 지원이 어려웠던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를 아예 포기할 무렵,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강해 뒤늦게 가까운 해남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해남중학교에서 그는 후일 그의 정신적 동반자가 되는 친구 이강을 만나게 된다. 중학교 졸업 후 지역 명문고라 할 수 있는 광주일고 진학 후에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실망하여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치른 후 서울대를 목표로 3년을 재수하면서 입시공부를 했다. 그러다 1969년, 24살의 늦은 나이로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친구 이강은 전남대 법학과에 재학중이었다. 당시 그는 『창작과 비평』, 『네루다 서정시집』 등을 접하고 친구 이강이 군대에서 보내주곤 했던 영문서적들 『들어라 양키들아』, 『스페인 내란』, 『레닌의 생애』, 『인간의 세속재산』 등을 통해 세계역사와 우리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전남대 재학 중이던 1972년 19월, 해남 집에서 라디오를 통해 10월 유신 선포를 들었다. 김남주는 즉시 광주로 올라와 이강과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행동에 나서자고 결의한다.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황토현 일대, 여순항쟁이 벌어진 여수와 순천,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인천 월미도 등을 답사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지하신문과 러시아혁명기 지하신문에 대해 연구를 한 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목소리가 거족적으로 울려 퍼져야 한다는 의미로 『함성』이라는 제호를 붙였다. 책을 팔고 이강의 전세금을 사글세로 전환하고 동무들의 용돈과 금반지 등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1972년 12월 9일 전남대와 광주 시내 고교 등에 살포하고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수사를 받기 시작했다. 서울로 피신하여 이강의 6촌 동생의 이개석의 자취방에서 머물다가 1973년 2월, 반유신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지하신문의 제호를 『고발』로 바꾸어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강의 편지가 중앙정보부 검열에 발각되어 체포, 김남주와 이강을 포함한 9명이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이후 김남주는 전남대에서 제적되었으며 9개월 동안의 교도소 생활 후 공탁금 3만원을 납부하고 석방되었다.
김남주는 출옥 후 1974년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중앙정보부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체험과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쓰는데 전념했다. 그가 시인으로 등단한 것도 이때인데,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감옥체험과 농촌현실을 노래한 시 「진혼가」, 「잿더미」, 그들은 누구와 자고 있는가」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김남주의 동생 김덕종의 회고에 의하면 김남주는 당시 1만 5천 원 정도의 원고료를 받았다. 원고료가 든 전신환을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바꿔 술과 약간의 안주를 마련하여 아버지를 대접했다고 한다. 이후 광주에서 사회과학전문서점인 ‘카프카’ 등을 운영하다가 1974년 다시 해남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그가 마주한 고향에서는 여전히 산림계 직원이 나와 벌금과 징역을 떨어뜨려 시골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농민과 농산물이 하대를 받는 등의 생활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농부들과 더불어 생활하며 새로운 농민시의 전형을 준비하고 농민운동가 정광훈, 윤기현 등과 사귀면서 조직적인 농민운동과 농민시의 한 전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새로운 농민문학의 형태를 발견한 김남주는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황석영, 최권행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만들고자 1977년 광주로 올라온다. 70년대 폭압의 시대를 견디기 위해 이론적 필요성을 느끼고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우리 조국을 가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 「파리코뮌」을 강독하던 한 학생의 밀고로 수배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이때 상당한 조직력을 갖추고 많은 피신자들을 집결시켰던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인 ‘남조선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에 가입하였다.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세계를 뒤덮은 10일간』, 『스페인 내란』 등을 번역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러다 1979년 10월, 남민전 총책인 이재문 등과 잠실의 아파트에서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가 이감되어 긴 투옥생활을 했다.
그는 옥중에서 교도관 몰래 수많은 옥중시를 써서 극비리에 유출하였다. 그렇게 유출된 시들은 80년대 우리사회의 변혁운동에 일대 도화선이 되었고 운동권 사이에서 감동적으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감옥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시를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통째로 내용을 외부도 있다가 면회 온 외부인사가 가족, 출감하는 학생과 민주인사들에게 구술하여 전해주거나 담당이 없고 불이 켜 있는 밤을 이용해 번개같이 적어둘 수 밖에 없었다. 교도관에게 들키지 않으려 우유곽을 해체했을 때 나오는 은박지만을 얇게 떼어내 못으로 긁어 쓰고 그마저 들키지 않으려 변기 안에다 감추기도 했다. 나중에 다듬고 고칠 수도 없어서 대개는 초고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되었고,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김남주가 수감된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전국의 문학단체에서 석방 촉구 성명서와 탄원서가 쏘아졌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국내·외 여러 방식과 단체에서 지속적으로 석방 운동을 벌였고, 이에 1988년 12월 21일, 구속된 지 9년 3개월만에 형집행정지조치로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1989년 광주 문빈정사에서 지선스님의 주례와 고은 시인의 축사, 친구 이강의 사회로 남민전의 동지이자 약혼녀인 소설가 박광숙과 결혼식을 올렸다. 박광숙은 남민전 활동 당시 김남주와 얼굴만 알 정도인 여성이었는데, 그가 투옥되자 감옥으로 찾아와 옥바라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요청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했으나 박광숙은 책과 편지를 건네며 옥바라지를 시작하였고, 그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김남주는 옥중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시를 쓰고 사상을 견고히 했다. 이후 1990년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는 만국의 노동자가 금·토·일을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토일(土日)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출소 이후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 그리고 여러 가지 집회 참여와 강연 등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크고 작은 행사는 물론 무슨무슨 모금용 일일호프집까지 그를 불렀고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동을 하고 싶어했다. 살던 서울집과 가까운 강화도에 땅을 얻어 그곳에 거취를 정하고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꾼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농사일을 하며 새로운 시의 힘을 얻으며 강연활동과 투쟁을 함께 하려고 하였으나 오랜 옥고로 인해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아 1994년 2월 13일 서울고려병원에서 불과 마흔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민족시인 고 김남주 선생 민주사회장’ 영결식이 경기대 민주광장에서 거행되었으며 전남대 5월광장에서 노제를 치른 뒤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되었다.
김남주의 초기시는 그 시들의 바탕이 되는 개인사적 경험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양분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유신 직후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든 혐의로 체포되어 혹독한 수사를 받은 끝에 10여 개월 옥고를 치른 경험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숙명처럼 지녔던 농촌과 농민문제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출발한다. 그의 대표작 「진혼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잿더미」, 「한 입의 아우성으로」 등에서 보여주는 특징은 부끄러운 자기 존재에 대한 처절한 확인이다. 체포와 고문이라는 최악의 육체적 학대에 직면하여 자신의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그것은 때로 연민과 자기비하로까지 발전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는 그의 농촌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아우를 위하여」, 「추곡(秋穀)」, 「우습지 않느냐」, 「달도 부끄러워」 등이 그러한 작품인데, 출옥 후 도시에서의 소시민적 지식인의 삶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발견한 것은 여전히 피폐한 농민현실과 가족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빈사의 농촌현실은 김남주에게 있어 온갖 관념성을 던져버리게 하는 구체적 동인이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경험해야 했던 가장 밑바닥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한 인식과 행동을 지향하기에 이른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발간한 첫 시집이 바로 『진혼가』다.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그의 굳은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문익환은 이 시집에 수록된 「진혼가」, 「눈을 모아 창살에 뿌려도」 작품을 가리켜 비장미보다 더한 처참미라 표현하기도 했다. 투옥중이던 1987년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를 출간하는데, 제2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훨씬 강력한 메시지와 자신감, 당당함이 느껴진다. 시집이 나오기 전부터 음성적인 문건 형식으로 은밀히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읽히면서 일찍이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였다. 1988년 발간된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는 김남주의 전주교도소에 있을 때 후배들이 그의 시 애독자들을 위해 이전의 시집 『진혼가』와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렸던 시편들, 그리고 옥중에서 새로 쓴 시를 총망라하여 발간한 것이다. 초기시에서 보이던 억눌리고 날카로운 정서가 하나의 원숙한 시적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소 후 1년 만에 출간된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 역시 작품 대부분은 감옥에 있을 때 쓰여진 시였다. 출소하는 사람들에게 맡겼던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약혼녀인 박광숙에 대한 이야기들이 「철창에 기대어」,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등의 작품에 드러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91년 제5시집 『사상의 거처』가 출간되었다. 오랜 감옥살이를 끝내고 돌아온 일상에서 겪었던 잠시의 방황과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다잡는 마음이 담겨있다. 농사를 지을까, 시를 쓸까 갈등하며 세상이 자신을 좋을 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자신에게 더 강하고 높은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앞으로의 살아갈 길에 대한 고민이 「길」, 「사상의 거처」 등에 드러나 있다. 감시 속의 휴식과 공포가 주는 일상의 피로는 「악몽」에 잘 드러나 있다. 새벽마다 지아비의 헛소리 혹은 발작이나 광기를 지켜보면서 아내를 아이를 꼭 껴안고 울부짖는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감시의 폭력 속에서 한 가정이 무너짐을 처절히 보여준다. 그리고 1992년, 생전에 출간된 마지막 시집 「이 좋은 세상에』를 출간하며 그간 자신의 시가 보여준 이념과 사상, 즉 관념에서 벗어난 시를 쓰기 위해 노동과 투쟁이 행해지는 농촌이나 어촌, 광산촌, 공장지대 등으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피력한다. 그러나 그는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 밑바탕에는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며 경험한 농촌공동체의 정신이 깔려 있다. 그의 자연적 서정은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통해 자신을 내면화시켰다. 자유와 투쟁을 노래한 시이든, 통일을 노래한 시이든, 민중과 민족을 노래한 시이든, 고향의 풀꽃을 노래하는 서정시이든 김남주의 모든 시편들은 흙과 대지 위에 자신의 시 정신을 탄탄하게 세우고 있다. 예컨대 그의 시적 상상력하며 시적 언어들은 대부분 그의 고향 해남의 논과 밭에서, 그리고 그곳에 사는 농민들의 삶 속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거칠게 쏟아내거나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정치현실을 질타하는 시에서도 마침내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적시거나 흔든다. 그의 전투성에는 대지와 인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이 있었다. 「무덤」, 「옛 마을을 지나며」, 「장난」 등의 작품이 바로 이러한 정서를 담은 시들이며 특히 고향을 찾아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겨운 모습이 행간마다 절절이 배어있는 「추석 무렵」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하게 한다. 휴머니즘과 서정성, 한국의 마지막 농촌시인 혹은 농민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