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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출신 문학인

황지우

해체를 통한 현실 부정의 미학, 황지우 (1952~)

황지우시인사진 1952년 전남 해남군 북일면 배다리에서 태어났다. 1971년 광주일고에 진학하여 김승옥 소설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소설은 황지우의 진로에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이후 1972년 서울대 철학과(미학 전공)에 진학하여 시인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1973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유신반대 시위 연루로 구속되어 강제로 입영을 당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연혁(沿革)」이 입선되고 계간 『문학과 지성』에 시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이때부터 ‘황재우’라는 본명 대신 ‘황지우’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1983년 첫 번째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으로 제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1982년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1987년 『나는 너다』,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를 출간했다. 이때 『뉴욕타임즈』에 「그날 그날의 현증 검증」이 소개되었다. 1990년 『게 눈 속의 연꽃』, 1991년 시선집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聖 가족』을 출간하였다. 1991년에 제26회 현대문학상, 1993년에 제8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4년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미술에 소질이 있어 1995년 조각전(서울 학고재 화랑)을 열기도 했으며 조각과 시를 한데 묶은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를 출간했다. 1997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98년 『어느날 나는 흐린 주막에 앉아 있을거다』를 출간한 후 제1회 백석문학상 및 제7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 시극 『오월의 신부』를 집필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뮤지컬 공연을 열었다. 2006년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되었다. 형제 중 형 황승우(혜당스님)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동생 황광우는 작가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황지우 시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형태 파괴의 해체시에 있다. 그는 콜라주와 패러디, 시각적 활자 구성, 몽타주, 다큐멘터리 등 거의 모든 실험적 양식을 시에 끌어들여 자동화된 일상적 의식에 충격을 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 형식은 단순한 형식에서 그치지 않고 시대와 역사에 대응하는 정치적 무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당시 유행했던 민중시에 비해 현실도피적이고 지식인적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황지우는 시를 ‘당대에 대한, 당대를 위한, 당대의 유언으로’쓰고자 했다. 그가 시인으로서 바라본 1980년대는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찬 곳이자 차라리 초월해버리고 싶은 환멸의 공간이었다. 역사적인 비극을 암호화하여 전달해야 하는 정치적 상황과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무 반성 없이 속물적으로 사는 지식인들을 묘사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풍자적인 모습이 작품으로 드러난다. 특히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자 역사적인 민주화항쟁이 벌어진 ‘광주’는 그의 작품 속에서 빈번히 상흔의 흔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초기시가 가지고 있는 전위성은 암울한 현실에 대응하는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의 시들은 문학이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사회참여의 한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김준태

흙과 대지에서 발견한 생명성, 김준태 (1948~)

김준태 사진 1948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대지리에서 태어났다. 김준태가 처음으로 문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당시 그는 ‘창문을 열어놓으니 / 달이 내게 다가와 어루만져준다 / 아 하늘의 달만이 나의 친구인가’로 시작되는 「달밤」이라는 시를 써서 담임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중학교 때부터 『사상계』를 탐독할 정도로 명민했으며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조선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경남 사천, 전남 함평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69년 『전남일보』, 『전남매일』에 각각 「재기」, 「이 봄의 교향악」이 당선되었으며 조태일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지에 「머슴」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 후 고정희 등과 함께 <목요시동인> 활동을 했다.

김준태의 시 세계는 근대사의 질곡에 버금가는 그의 가족사와 인생사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부는 일제강점기 오사카 탄광의 노무자로 징병되어 끌려갔고 부친은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남양군도 콰이강의 다리 부근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탈출했다. 게다가 부친은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것이 화근이 되어 8.15해방공간에서 30대 초반에 보도연맹 집단학살로 목숨을 잃게 된다. (1950년 11월경 해남군 화산면과 현산면의 경계인 산등성이에서 마을사람 10명을 포함한 수십 명과 함께 총살) 그는 이러한 비극적 가족사를 초등학교 시절에 조모로부터 전해 들었으며 후일 「갈매기섬」, 「형제」 등 작품에서 그 민족사적 비극을 노래하였다.

또한 김준태 본인은 1970년 군복무 중 월남전에 강제 파병되어 1년간 전장을 돌며 국가에 의해 강제된 삶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1977년 발간된 그의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에 이러한 분위기가 녹아 있는데, 그는 시집에서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국가의 발전을 내세우는 권력과 자본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군사독재정권을 연장하려는 신군부의 탄압에 맞선 광주 시민의 민중항쟁,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전남매일』에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일부 게재하여 전 세계의 외신에게 광주의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시 발표 후 『전남매일』은 강제 폐간되었으며 김준태 역시 광주 화정동 소재의 보안대에 투옥되어 1개월간 고문을 당하며 교사직에서 해직된다.

1970년대 김준태는 신동엽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땅에 기반한 삶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민중시인의 전범이었다. 해직 후 1983년 9월 복직하기까지 학원강사를 전전하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시대에 대한 울분과 불안정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을 진정으로 껴안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마침내는 공동체의 이상을 찾아가는 시학을 형성한다. 그는 두 번째 시집 1981년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에 이어 1984년 시집 『국밥과 희망』, 1986년 시집 『불이냐 꽃이냐』, 시집 「넋 통일』, 산문집 『시인은 독수리처럼』, 1988년 시집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평론집 『5월과 문학』, 1989년 시집 『칼과 흙』, 1991년 시선집 『통일을 꿈꾸는 슬픈 색주가』, 1994년 시집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1999년 시집 『지평선에 서서』, 산문집 『인간의 길을 묻고 싶다, 세계명시해설집 『사랑의 확인』, 2004 소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2006년 문학기행집 『세계문학의 거정과 만나다』, 2007년 시선집 『사람이 바로 길이다』, 통일시해설집 『통일을 여는 시-백두산아 훨훨 날아라』, 2009년 『명노근 평전』 등의 저서를 발간하며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김준태 시에 나타난 전반적인 시적 주체는 대체로 광주, 역사, 통일문제로 집약된다.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명 방법을 가지고 있다. 어릴적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조모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해 온 그 정신, 바로 생명 존중과 사랑의 정신이다 그는 그에게 가리어진 시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현재의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다. 어떠한 상처와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구원의 거처는 바로 땅에 있으며 분단과 대립을 넘어서는 길이 생명적인 통일에 있다고 주장한다. 근래에는 작품에서 다시 고향의 ‘밭’을 이야기하며 열린 생명 사랑이 실현될 수 있는 곳에서 시적 확장을 꾀하고 있다.

윤금초

한국 현대시조의 자존심, 윤금초(1943~)

윤금초 사진 1943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갑길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해남을 시문학의 성지로 이끈 고산 윤선도(1587~1671)의 12세 후손이자 외가쪽으로는 다산 정약용 선생과 혈맥이 닿아있다. 중학교 졸업 후 동네 서당에 다니며 한자를 익히며 그때부터 동시 수준의 한시(漢詩)를 종종 짓곤 했다. 본격적으로 문학을 만난 시기는 고등학교 2학년 ‘전국 고교 문예 콩쿨’에 소설로 입상을 하면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등 한국 문단의 쟁쟁한 실력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66년 공보부(현 문체부)가 주최한 신인예술상 시조부문에 입상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67년 「내재율」1,2,3으로 『시조문학』에 3회 추천을 받는데, 「내재율」은 글자 수를 따지는 외형률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내재율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시조 고유의 가락을 살려내고 토속적 정서를 시조로 승화시킨 작품이었다. 시조가 외형률의 제약을 받는 닫힌 문학 양식이 아니라 내재율을 중시하는 열린 문학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안부-어느 싸움터인가, 내 아우여」가 차례로 당선되었다. 「안부-어느 싸움터인가, 내 아우여」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동생을 베트남으로 보낸 슬픔을 담은 작품으로 당시 시인이 바라보며 겪은 세상의 부조리와 공포, 염려 따위가 하나로 승화된 작품이다.

윤금초의 시 세계 중 단연은 다양성과 개방성이다. 윤금초는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양장시조 등 다양한 양식을 아우르는 혼작 형태, 즉 옴니버스 시조를 내세우며 홀로 시조 양식의 확장을 꾀했다. 그는 시조를 낡은 시대의 유물처럼 여기는 세상의 눈에 주목했고, 틀에 갇힌 시조가 현대적 장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는 양식적 확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백악기 여행」, 「산은 둥둥 나에게 와서」, 「인터넷 유머」, 「엘니뇨, 엘리뇨」 등의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행했다.

1977년 시조집 『어초문답』, 1983년 합동시조집 『네 사람의 얼굴』, 에세이집 『갈봄여름 없이』, 1990년 수필집 『사랑의 텔레파시』, 1992년 수필집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사랑』, 1993년 시조집 『해남 나들이』, 1995년 5인 시조집 『다섯 빛깔의 언어 풍경』, 199년 6인시조선집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 2001년 시조집 『땅끝』, 2003년 시조집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시조창작이론서 『현대시조쓰기』, 2004년 시조집 『주몽의 하늘』, 2009년 현대사설시조포럼 『청동의 소리』 등을 출간했으며 1986년 정운시조문학상, 1991년 민족시가대상, 1993년 중아일보사 중앙시조대상, 1999년 가람시조문학상, 2001년 이호우시조문학상, 2002년 고산문학대상, 2006년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윤금초는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찾고자 골몰하며 실험과 도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활발한 창작활동으로 시조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작품들을 연달아 발표함으로서 한국 시조 문학을 대표하는 정형 시인의 자리에 올랐다. 오늘의 시조학회 회장, 민족작가회의 자문위원, 경기대 겸임교수 등을 역임하며 시조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지엽

시조문학 대중화의 기수, 이지엽(1958~)

이지엽 사진 1958년 전남 해남군 마산면 은적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경영이다. 그의 문학적 기질은 초등학교 때부터 싹을 틔웠다. 해남서초등학교 재학시절 각종 글짓기대회와 사생대회, 웅변대회에서 60~70여 차례나 상을 받았고 이에 교장선생님께서 이지엽의 일기장에 ‘너는 커서 훌륭한 문학가가 될 것이다’라는 글귀를 써주었다고 한다. 이는 이지엽이 장래희망을 ‘문학가’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72년, 중학교 2학년 때 온 가족이 서울로 상경하여 면목동 중량천변 뚝방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경동고등학교 재학 당시 교내 문학동아리인 ‘상단(上段)’ 33기로 참여하여 문학공부를 이어갔으며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친구 김동찬과 함께 2인 시집 『제목 없는 전설』을 발간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에 졸업식에서 문예공로상을 수상하고 1979년 첫 시와 시조집 격인 『아리사의 눈물』을 발간하게 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시 「촛불」로 1백만 원 고료에 당선된다. 이경영이라는 본명 대신 이지엽이라는 필명을 쓰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후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일어서는 바다」가 당선되어 시와 시조, 두 개의 왕관을 쓰고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1985년 시집 『다섯 계단의 어둠』, 1989년 시조집 『떠도는 삼각형』, 1990년 시집 『샤갈의 마음』, 1994년 최한선과 함께 집필한 문학이론서 『한국 현대문학의 사적 이해』, 5인 사화집 『다섯 빛깔의 언어 풍경』, 1995년 이론서 『당신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1996년 채희윤과 함께 집필한 『동시·동화 창작론』. 1997년 문학연구서 『한국 전후 시 연구』, 2000년 시조집 「해남에서 온 편지』, 2001년 시집 『씨앗의 힘』, 2003년 수필집 『얼굴-동자승 이야기』, 산문집 『지하철 편지』, 2006년 시집 『북으로 가는 길』 등을 출간하고 1998년 한국시조작품상, 1999년 중앙시조대상, 2006년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열린시조』 및 『시조시학』 편집 주간을 맡으며 경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지엽의 시 세계를 지탱하는 힘은 짐스러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궁핍했던 과거의 기억이 오히려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는 긴장과 역설이 그의 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기억 속 깊이 자리 잡은 유년시절의 가난이나 오늘의 일상을 자연의 풍경에 투사하여 동화시키면서 삶의 온기와 활력을 충전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지엽 시 정신의 기둥이다. 1992년 광주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면서 발견한 남도정신은 민중 기층 의식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과 생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에 기댄 시편들을 발표하게 한다. 그는 시조시인으로서 시조의 현대성을 확장하려는 실천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전통적인 시조 형식을 바탕으로 현대시적인 형식미를 발휘하여 그 활용의 진폭을 확장시킨다. 자유시 정신에 기대어 종래의 고정된 시조의 틀을 벗어나 다양한 변화를 꾀하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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