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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작가소개

시인 고정희 사진

한국 여성주의 운동의 선구자, 고정희(1948~1991)

출 생 지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259번지
대 표 작
「상한 영혼을 위하여」, 등
소장자료
동인지 등

작가연보

  • ·1948년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259에서 아버지 고양동과 어머니 김은녀 사이에서 5남 3녀 중 장녀로 출생, 본명은 고성애(高聖愛)
  • ·1954년삼산초등학교 입학
  • ·1959년삼산초등학교 졸업
  • ·1967년『새농민』지에 장만영 시인의 호평과 함께 작품이 실림
  • ·1968년광주 ‘현다실’에서 개인 시화전을 가짐
    지역 잡지 「월간 해남」 기자 및 지역 문학회 활동
  • ·1969년목포지역 젊은 문인들로 이루어진 『흑조』 동인으로 활동
  • ·1970년『새전남』 및 『주간전남』 기자로 활동
  • ·1974년광주YWCA 프로그램부 간사로 활동
  • ·1975년『현대시학』에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 ·1979년한국신학대학 졸업
    허형만, 김준태, 장효문, 송수권 등과 함께 『목요시』 창간 동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및 시창작분과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제1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배재서관) 출간
  • ·1981년제2시집 『실락원 기행』(인문당) 출간
    기독교문사 「기독교대백과사전」 편찬실 근무
  • ·1983년제3시집 『초혼제』(창작과 비평사) 출간
    제4시집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출간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수상
  • ·1984년크리스챤아카데미 출판담당간사로 활동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 ·1985년『예수와 민중과 사랑 그리고 시』(기민사) 엮음
  • ·1986년한국가정법률상담소 편집부장 활동
    제5시집 『눈물꽃』(실천문학사) 출간
  • ·1987년제6시집 『지리산의 봄』 출간
  • ·1988년45일 동안 유럽여행
    그림마당 ‘민’에서 여성미술연구회와 함께 여성 해방 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 참여
    「여성신문」 초대 주간
  • ·1989년제7시집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창작과 비평사) 출간
  • ·1990년제8시집 『광주의 눈물비』(동아) 출간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아시아종교음악연구소 초청으로 1년간 「탈식민지 시와 음악 워크숍」 참여
    필리핀 체류 중 「밥과 자본주의」, 「외경읽기」 등 연작시 집필
    제9시집 『여성해방출사표』(동광출판사) 출간
  • ·1991년제10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출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가족법 개정 운동사』 편집 및 제작
    6월 9일,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
  • ·1992년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출간
  • ·2001년제11시집 『뱀사골에서 쓴 편지』(미래사) 간행

작가생애

고정희(서울).jpg

8남매 대가족의 장녀

고정희는 1948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259에서 아버지 고양동과 어머니 김은녀 사이에서 5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고성애(高聖愛)다. 그의 아버지는 공식적인 근대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1920년대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군수물자 공장에서 노조위원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다년간의 일본생활로 신식 사고방식을 익힌 그의 아버지는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키우며 특히 세계역사를 재미있게 이야기로 꾸려 전달하곤 했는데, 고정희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와의 대화를 좋아했다. 고정희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남다른 지식에의 욕구와 바깥 세계로의 동경을 채우는 동시에 지적 자극을 유발하는 계기를 제공받았다. 그의 아버지 역시 장녀이자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이어받은 고정희를 매우 아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혼란의 시기에 고정희는 집안의 맏딸로서 공부보다 농사일을 먼저 배워야 했다. 이에 입학적령기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1, 2학년 과정을 뛰어넘어 3학년에야 간신히 학교에 들어가 정식교육을 받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소녀

대가족의 장녀로 태어나 늘 집안일을 도와야 했던 그의 유일한 낙은 독서와 집 근처의 대흥사를 찾아 사색하는 것이었다. 고정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읽을 수 있을 때부터 책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소년소녀명작전집』에 수록된 「거지왕자」, 「아라비안 나이트」, 「알프스의 소녀」 등의 명작을 탐독하는데 완전히 빠져 끼니도 거른 채 신들린 아이처럼 책에만 들러붙어 있었을 정도였다. 불을 지피기 위해 아궁이 앞에 앉아있으면서도 책을 읽는데 정신이 팔려 아궁이 불을 꺼트리기도 했고 저러다 미치는 것 아니냐며 어머니로부터 호된 매를 맞기도 했다. 이후에는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뒤안 툇마루나 다락방에서 몰래 책을 읽었다. 농번기에는 결석하기가 일쑤였지만 늘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도지사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경제적 사정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의 정식교육은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났다.

호기심 가득한 유년시절

고정희는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가 누구라도 집으로 불러 함께 밥을 먹고 대화나누기를 즐겼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 굿을 한다고 하면 항상 쫓아가서 유심히 보고 관찰하였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주변에 끊임없이 질문하곤 하였다. 당시 해남에서의 ‘굿’이란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농번기에는 농사일과 함께 행하는 삶의 일부였고 그 굿가락은 동네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내는 역할을 했다. 후일 고정희가 ‘마당굿시’라는 장르를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어 낸 점 역시 유년시절의 경험과 긴밀히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기자로 활동하며 홀로 문학수업을

고정희는 1960년대부터 지역의 문학동호인들이 결성한 <두륜문학회>에서 활동하며 습작시를 지면에 발표하거나 문학의 밤 등에 참여하며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지역언론지인 『월간 해남』의 기자이자 직원으로 활동하며 기사를 취재하고 원고를 쓰는 등 홀로 문학수업을 했다. 그리고 1967년 『새농민』에 장만영 시인의 추천으로 시가 실리고 호평을 받으며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광주에 있는 ‘현다실’에서 개인 시화전을 갖고 1969년 목포지역의 젊은 문인들이 모여 만든 「흑조(黑潮)」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생계를 위해 『새전남』, 『주간전남』, 월간 『백조』, 『소녀생활』 등의 잡지사와 신문사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한국신학대학 입학과 등단

고정희는 1975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한다. 시를 쓰는 그가 신학대학에 들어간 것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그 자신이 충실한 신앙인이기도 하였거니와 문학을 보다 철저히 하기 위해서는 신학 공부를 해야한다는 본인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서였다. 수유리 캠퍼스에서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체험은 이후 그의 문학세계를 이룬 첫 번째 삶의 지주가 된다. 수유리는 광주, <또 하나의 문화>와 함께 본인 삶의 3대 행운이라고 일컬을 만큼 삶과 시세계에 깊은 영향을 준 공간이었다. 당시 함께 학교를 다니던 동기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무척 성실하고 열정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라디오 영어 강좌에 몰두하고 많은 책을 읽으며 클래식 음반 듣기도 좋아했다고 한다. 학업에 매진하며 같은 해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부활 그 이후」, 「연가」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지치지 않는 학구열

한신대를 졸업한 뒤 그는 허형만, 강인한, 장효문, 국효문 등과 <목요시>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목요시>는 전라도 출신의 시인들로 조직된 시 모임으로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고정희는 시적 역량을 공고히 다져나갔다. 이런 행보 속에서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출간하였는데, 당시 그는 광주YWCA에서 청년·대학생 지도 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대구 반월동 수석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며 지역 시인들인 이하석, 이진홍, 박진형 등과 친분을 쌓으며 이 지역 문단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졌다. 시작(詩作) 활동과 함께 전도사 사역, 야간학교 강의 등 일정을 소화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경북대에서 김춘수 시인의 강의를 청강하며 시 장르에 대한 치열한 탐색전을 펼쳐 갔다. 그는 당시 김춘수의 <무의미 시>를 반박하는 날카로운 평문을 선보여 평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성 해방 문학을 이끈 시인

고정희가 활동한 1970~80년대는 문학의 현실참여에 대한 의지가 가장 활발하게 창작에 표현되고 논의된 시기였다. 정치·사회적 격랑 속에서 민중에게 부과된 억압에 대한 자각과 그에 대한 저항이 첨예하게 대두되었고,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고정희의 시적 실천의 단초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위치한다. 사회구조와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들은 점차 범위를 넓혀 여성의 사회적 억압에 대한 지각으로 이어졌고 고정희는 당대의 시적 형식과 내용인 여성주의시, 노동시, 민중시, 장시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평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사회적,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새로운 시 형식의 가능성을 부단히 탐구했으며 부정의 현실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 금기시되었던 시적 언술들을 해방시켰다.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출사표』 등의 시집에서 페미니즘에 입각한 여성 문제에 대한 폭넓은 탐색을 통해 여성해방의 실천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하였다.

나 자신에게 절박한 것을 써야 비로소 시

그는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이기도 했지만 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거침없이 저항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문학의 영역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여성의 삶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데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는데, 그는 나 자신에게 절박한 것을 써야 그것이 시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시는 내가 믿는 것을 실현하는 장이며 내가 보는 것을 밝히는 방이며 내가 바라는 것을 일구는 땅이라 주장했다. 여성운동과 여성문제를 자신의 시 속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문학과 삶의 실천적 연계를 점차 심화해나가며 삶의 열정을 불태우던 고정희는 평소 즐기던 지리산 산행을 통해 재충전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고정희가 실족사로 타계한 그날 아침, 지리산에는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물이 불어난 상태였다. 뱀사골을 향해 산행을 하던 중 더 이상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건넜던 징검다리를 되건너 돌아오려다 급류에 휩쓸려 타계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 <목요시> 동인이던 김준태 시인은 그의 장례 절차와 의례를 주도하여 ‘민족문학인장’으로 치르고 장례식의 사회를 맡았다. 산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지리산을 좋아하며 『지리산의 봄』을 썼던 고정희는 지리산에서 생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작품세계

기독교적 접근을 통한 삶의 구원

고정희는 기독교적인 실존문제에 입각한 시작을 통해 삶의 구원을 모색해 나간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서정시적, 기독교적 구원 의식의 발현, 전통적 양식으로서의 장시적 특성, 민중적 관점에서의 실천적인 사회 참여 의식 등 다양한 관심과 시적 진폭으로 뚜렷한 시적 지향점을 확보하고 시작(詩作)에 매달리며 당대의 사회 문제적 핵심을 시의 언어로 날카롭게 그려내었다. 『실락원 기행』, 『이 시대의 아벨』 등의 시집을 통해 실존의 아픔에 관한 기독교적 접근을 보여주었고 정의, 구원과 해방을 향한 갈망을 노래하여 관심과 주제의 폭을 확장하였다. 특히 『실락원 기행』에서는 첫 시집인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에서 보여주었던 ‘나를 인식하는 실존적 아픔’에서 나아가 ‘나와 세계 안에 가로놓인 상황적 아픔’을 명백히 인식하며 타자지향적인 열정을 보여주었다.

여성을 통해 눌린 자의 표상을 구현

1988년 6월부터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에 취임하며 필생의 화두였던 여성문제를 향해 보다 실천적인 발걸음을 크게 떼어 놓는다. 바쁜 신문사 생활 속에서도 이듬해 제7시집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를 출간하여 또 한번 시단의 주목을 받는다. 이 시집에서부터 그의 여성주의적 시각이 본격화되는데, 목차를 비롯하여 첫째거리부터 일곱째거리까지 축원마당, 본풀이마당, 해원마당, 진혼마당, 길닦음마당, 대동마당, 통일마당 등으로 편성되어 있고 맨 마지막에 뒷풀이-딸들의 노래를 덧붙여 완연한 굿 양식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시집은 마당굿판의 실제 공연을 위한 대본으로 계획된 시집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고정희가 글을 쓰고 극작가 겸 연출가인 엄인희가 연출하고 무당 겸 현장운동가인 김경란이 마당에 서는 것으로 약속을 하고 작업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동의한 그날부터 그의 집에 모여 토론을 진행하여 집필하는 데만 만 9개월이 걸렸다. 폭압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죄 없이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방적인 제도적 힘에 의해 부당하게 억눌려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 눌린 자의 해방은 눌림 받은 자의 편에 섰을때만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눌림받은 여성의 대명사인 어머니의 본질에서 민족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성을 찾을 것을 천명한다. 또한 이후의 시집 『여성해방출사표』에서는 역사 속의 여성문학가인 황진이, 이옥봉,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의 목소리를 빌어 여성의 현실을 재해석한다. 역사적 여성 인물들을 여성 주체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고 그들의 삶을 재정의하는 과정을 거치며 남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서사양식을 활용하여 현대시에 접목

고정희의 시는 단지 페미니즘의 구호에 머무르지 않고 차차 민중을 향해 뻗어나갔다. 『초혼제』,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굿 양식, 판소리 양식, 민요 양식 등의 전통적 양식을 현대시에 도입하여 ‘한풀이’, ‘넋두리’의 정서를 성공적으로 시화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전통적 가락을 우수한 한 유산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현대시에 새롭게 접목시키고자 했다. 삶에 켜켜이 쌓여 있는 수많은 원망과 애환들을 한바탕의 연희로 풀어내고 원혼들을 달래는 굿 양식을 통해 고정희는 민중의 삶을 위무하고 억압된 삶의 욕망들을 해소하는 절절한 가락을 갖게 된다. 『광주의 눈물비』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우리 민족의 설화와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시편들을 통해 그는 민중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민중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어질수록 고정희는 민중의 삶과 애환을 보다 적절하게 담아낼 수 있는 시 형식을 찾는데 집중했다. 짧은 서정시의 형식으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민중들의 현실적 삶을 보다 여실하게 담아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장시 형식이었다. 그는 민중의 삶의 한 순간을 다루기보다 그들의 삶의 전체를 다루고자 했고 이를 위해 보다 많은 서사를 담을 수 있는 장시 형식을 택했다.

사랑에 대한 처연한 서정성

『초혼제』를 통해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부상하기 시작한 고정희의 명성은 『이 시대의 아벨』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다져진다. 특히 시집에 수록된 「상한 영혼을 위하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함께 생명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얻어 고정희 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거론된다. 이는 그의 마지막 시집인 『아름다운 사람 하나』에 더욱 영글어 구체성을 띠는데, 초기시에서 보여주었던 서정시적 지향으로 회귀하며 입체적인 시적 지향을 보인다. 「왼손가락으로 쓰는 편지」, 「그대 생각」 등의 작품 등을 통해 부재하는 님에 대해 구구절절 배어 있는 그리움, 스스로 독하게 절제하고 돌아서야 하는 사랑, 불로 타면서도 눈물이 흐르는 듯한 처연함 등의 정서를 부각시키고 있다.

또 하나의 문화

<또 하나의 문화>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목표 아래 인간적 삶의 양식을 담은 대안적 문화를 창조하고 이를 실천해가는 동인들의 모임이었다. 조헤정, 조형, 박혜란, 조옥라, 고정희 등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동인을 고정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열어둔 모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임은 고정희에게 여성주의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는데, 모임의 구성원 대부분이 여성학을 전공하거나 여성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과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 하나의 문화>는 고정희가 민중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느끼고 사회에서 타자화 된 노동자, 농민, 여성의 입장에 설 것을 다짐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모임의 동인지 『또 하나의 문화』 제4호에 「뱀과 여자」, 「소금과 여자」를 발표하며 여성의 삶에 대한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비판을 가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하나의 문화』는 고정희의 시적, 사회적 인식이 무르익은 터전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지만, 마지막 투고 원고가 실렸던 지면으로 의미 깊기도 하다. 1991년 발행한 제8호에 토론마당 성격의 시 「우리 시대 섹스와 사랑 공청회」를 마지막으로 게재하는데, 시인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인해 이 지면에 실린 작품이 마지막 발표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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