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의 근원을 통찰한 서정시인 박성룡 (1930~2002)
박성룡은 1930년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389번지에서 아버지 박동준과 어머니 손고당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많은 형제가 있었으나 3명은 성장과정에서 사망하고 박성룡을 포함한 2남 4녀만 장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갔던 아버지가 8.15광복과 함께 돌아왔으나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그에게 남긴 말이 “너무 허망하다”는 말이었다. 여섯 살에 가족이 모두 광주로 이사하였으나 4년 정도 늦은 출생신고 때문에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갔을 때도 박성룡은 혼자 남아 골목길을 지켜야 했다. 대신 한학을 했던 백부의 권유로 2년간 개명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일본어 등을 공부하였다. 광주서석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입학자격검정고시를 봐 광주서중에 입학한 것도 이러한 연령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겪게 된 이러한 성장과정은 그가 관조적인 심성을 지니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늘 급우들보다 조숙했고 아는 것이 많은 ‘늙은 소년’이었다.
그가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이 커진 때는 광주서석초등학교 5학년 무렵으로 트르게네프의 「랍인일기』를 읽은 후였다. 광주서중에 진학하여서는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는데, 일요일이면 캔버스와 이젤을 짊어지고 교외에 나가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화구나 물감 살 돈이 없어 그만두게 된다. 훗날 이 스케치 체험은 시에 있어 사물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통찰력을 키워주고 감각적 이미지의 능숙한 사용을 가능하게 하였고 후일 신문사의 미술담당 전문 기자로 활동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서중 문예부원으로 활동하며 교지 「무등」에 자신의 시를 발표하며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만해, 미당, 지용을 비롯한 청록파 시인들의 시편들을 접하며 우리말의 참맛을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중앙대 영문과에 입학하였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였다.
1955년, 50년대 광주 시단을 풍요롭게 했던 『영도』라는 동인지가 간행되었다. ‘영도’는 물이 얼기 시작하는 빙점(氷點)이자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깃점, 아무것도 없는 무치(無値)의 영(零)이기도 하지만 많은 가치가 시작되는 가능성의 출발점이다. 동인 대부분은 광주서중, 광주고 출신으로 아직 시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은 대학 초년생들인 박성룡, 강태열, 정현웅, 윤삼하, 박이문 등이 학자금을 절약하며 참여하였다. 김현승과 박흡의 지도 아래 동인지는 4호까지 출간되었으며 박성룡도 이 동인지에 「과실」, 「귀정」, 「바람 부는 날」, 「눈사람」, 「가로수」를 발표하였다. 『영도』가 나올 무렵, 광주에서는 목포를 중심으로 하여 호남일대를 장악한 동인지 『신문학』과 문학종합지 『시정신』이 있었다. 두 동인지의 화려한 지면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박성룡은 한국전쟁이라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영도』와 같은 패기 넘치는 동인지가 발행되었다는 데 큰 자부심을 지녔다.
대학 진학 후 서울살이를 시작하며 그는 꿈과 좌절, 허탈의 젊은 세대들과 어울리게 되는데 이 시절에 사귄 사람이 천상병, 전봉건, 박재삼 등을 비롯한 기성시인들이었다. 돈이 없어 학업 중단의 위기에 놓인 그에게 어느 날 전봉건이 동인지에 발표된 것이나 미발표작으로 시 5편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작품을 정리해 『문학예술』의 박남수 선생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박성룡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 『문학예술』의 시 추천은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 세 사람의 완전 합의에 의해서만 결정되었는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추천 받을 수 없는 어려운 관문이었다. 「교외(郊外)」, 「교외(郊外)1」, 「화병정경(花甁情景)」 세 작품이 추천되었는데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는 조지훈조차 “좋다는 찬사를 한마디 붙여준다”로 추천사를 썼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시적 스승으로 김현승, 서정주, 이한직, 조지훈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김현승, 서정주와는 광주에서부터 시작해 서울에서 와서도 꾸준히 왕래를 했고 특히 새해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술을 잘하는 서정주와는 술친구로 지내며 손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박성룡의 등단을 도운 조지훈은 박성룡을 유달리 총애하며 항상 데리고 다니며 술을 먹였다. 서울 성북동 자신의 집에 박성룡을 자주 끌고 가 밤새도록 대작을 하거나 1962년 박성룡이 늦장가를 가 단칸방에 신혼살림을 차렸을 때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봐야겠다며 찾아와 신부를 정신없게 만든 일도 있었다. 또한 술은 못하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김현승과는 당신이 손수 끓여내는 향기 짙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김현승은 박성룡의 어린시절부터 인연이 되어 바른 몸가짐과 시 세계를 구축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은 시인이다. 훗날 김현승이 수색에 머물 땐 해남 출신의 대표 시인 이동주와 함께 호남 출신 시인들이 많이 모여 이른바 「수색 에콜」을 이뤄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박성룡은 1957년 신태양사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사상계, 민국일보, 한국일보, 현대경제일보를 거쳐 서울신문 문화부 부국장으로 정년하기까지 30여년을 기자로 지내왔다. 그러나 언론인 생활도 그리 평탄한 것만은 아니어서 여러 차례 회사를 옮기며 근무하였고 종래에는 해고와 귀농, 복직을 겪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추진을 위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면서 당시 한국시협 회장으로 있던 조지훈이 회원들과 함께 한일회담 반대서명을 전개했다. 협회 회원이자 창림멤버였던 박성룡도 여기에 서명을 하였는데, 이 일이 문제가 되어 다니던 신문사에서 해고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가 일하고 있던 서울신문이 정부 기관지였기 때문이다. 그의 구명운동에 조지훈이 앞장서고 시인협회 임원들이 나서서 한국일보에 다시 취직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직장을 그만 두고 부평으로 이사하여 한동안 농부의 삶을 살았다.
박성룡은 1992년, 길어야 6개월이라는 직장암 진단과 함께 쓰러져 시작(詩作)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 후 두 번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고, 10여년의 투병 겸 요양생활을 하다 2002년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병환 중에도 중요한 문학 행사에는 틈틈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를 간 후에는 거의 시단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문학계에서는 그의 정신이 맑지 않아 시작 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꾸준히 글을 쓰며 창작활동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병석에 있으며 「병후비망」이라는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이 시편들은 세상에 대한 초탈자의 모습과 저승에 대한 예견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듯한 「쉼표(,)를 찍으며」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2002년 7월 27일, 경기도 안양병원에서 영면(永眠)하였다.
1950년대는 한국 시문학사 전개과정에서 한국전쟁이라는 큰 민족적 비극을 겪었던 시기다. 전통의 파괴와 부재라는 전후(戰後) 상황에서 단절의식을 이어주고 회복시켜 줄 통합의식이 필요했으며 이 자리에 전통주의 시가 놓여 있었다. 서정주의 전통의식, 청록파의 자연과 서정, 박남수의 감수성 등은 전후 한국 시단에 중요한 전통주의 경향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의 시적 경향을 주시하면서 감각과 정서를 다져온 시인이 바로 박성룡이다. 박성룡은 1950년대 후반 새로운 언어와 짜임새 있는 구조로 시단에 등장하였다. 그는 한국 서정시의 발전에 기여한 시인으로 전통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현대적 미학성을 적절하게 결합시킨 신(新) 서정 시인이었다. 순수 서정의 기초 위에 새로운 전통과 질서를 마련하기 위한 실험정신과 독창성으로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학창시절 한국전쟁의 비극을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전쟁의 혼란과 공포를 컴컴한 방에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견뎌냈는데, 그는 이때 인간이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충격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러 나갔던 어느 교외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생동하는 자연을 발견하고 자연의 영원한 생명을 동경하게 된다. 그는 작고 사소한 소재들 속에 만상의 본질적인 모습이 축소되어 있으므로 작은 것들의 세계에 대한 조명을 확대 심화하면 우주의 보편성을 노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소한 자연 풍물들은 시적 활력을 제공해주는 시 정신의 원천이었다. 그는 2~30대에 주로 자연을 제재로 깊이 있는 통찰의 시를 추구하였으며 정치한 이미지의 단단한 구조력이 돋보이는 시를 썼다. 초기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춘하추동』에 실린 시들이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풀잎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관찰하여 풀잎이 지닌 풋풋함과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한 동시 「풀잎」은 1975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며 널리 회자되었다.
1959년 젊은 시인들이 모여 만든 『신풍토』라는 작품집(anthology)을 발간하게 된다. 박성룡은 이에 「과목(果木)」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서정시 혹은 변형된 리리시즘(lyricism)의 한 표본으로 평가되었다. 시의 짜임새나 선택한 언어들이 참신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이 시는 1950년대 한국의 명시(名詩)로 손꼽힌다. 특히 사태(事態), 경악(驚愕), 박질(薄質:메마름), 멸렬(滅裂), 황홀(恍惚), 은총(恩寵) 등 다수의 한자어를 사용하여 시에 회화적, 조형적, 음악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박질(薄質:메마름) 등 국어사전에도 없는 자신만의 조어(助語)를 동원하여 시의 깊이와 상상력을 더하였다.
그는 시가 거창한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어야만 좋은 시가 된다는 데에 의아심을 가졌다. 사회의식으로 체험한 아픔과 괴로움을 설익은 언어로 구호로써 뱉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화시켜 앙금으로 가라앉히고 그 앙금을 정서의 물로 반죽하여 이미지를 빚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순수·참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빚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대의 다양한 시류적 문학 경향이나 사조에 휩쓸리는 것을 경계하여 특정 유파의 지향성을 거부하였으나 자신의 삶의 체험을 통해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아픔을 객관화된 서정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였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지닌 전형적인 현대인의 삶을 살아가며 그는 자연스럽게 시적 소재를 현실적 삶이나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집중시켰다. 특히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심상, 인정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며 따스한 인정이 스며든 시집 『동백꽃』, 산문집 『시로 쓰고 남은 생각들』 등을 출간하였다.
197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한국문학사상 처음으로 『민족문학대계』를 기획하였다. 역사에 눈을 돌려 우리의 것을 찾고, 민족의 맥을 더듬어 주체적인 전통문화를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철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박성룡도 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사학자들과 직접 의견을 교환하고 문헌적인 자료를 조사하며 직접 사적을 현지 답사하여 사건의 발생 연혁을 취재하였다. 이렇게 하여 쓰여진 작품이 바로 「백자를 노래함」 20편의 연작시이다. 백자를 통해 우리 고유의 한과 시름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시인으로서 민족정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를 보여 준 시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우리민족에 대한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을 새롭게 각성하고 역사적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이제 그 만세 소리들은」, 「꽃의 함성」 등을 통해 3.1운동을 표현하고 있으며 「독도」, 「임진강에 가서」 등을 통해 영토의 중요성과 남북 분단에 대한 고뇌 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