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적 서정과 정한의 시인, 심호 이동주 (1920~1979)
이동주는 전남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 787-1번지에서 부친 이해영(李海瑛)과 모친 이현숙(李賢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27년 조부가 세운 달산학교(현 현산초)에 입학, 1932년 졸업 후 외가가 있는 충남 공주로 이사하여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문예』지에 「황혼(黃昏)」, 「새댁」, 「혼야(婚夜)』 등이 미당 서정주에 의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1979년 영면(永眠)하기까지 30여년 가량의 문단생활을 하며 미발표작품까지 포함하여 시 150여 편, 소설 1편, 수필집 1편, 시론 및 평론 5편을 남겼다.
이동주는 1920년 2월, 전남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에서 부친 이해영(李海瑛)과 모친 이현숙(李賢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오천석(五千石)군의 거부(巨富)로 조부(祖父)와 백종조(伯從祖)가 참판(參判) 벼슬을 지내 해남 일원에서는 「兩참판」댁으로 불리며 하늘을 찌를듯한 권세와 영화를 누려왔다. 당시 그의 집은 8백여 평 부지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대궐 같은 기와집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가세를 뽐냈다. 그러나 부친의 방탕으로 점점 가세가 기울다가 1931년 무렵, 그의 나이 열두 살 정도에 아주 영락(榮落)해버렸다. 종래에는 충남 공주의 외가에서 지내야 할 정도로 쇠락하여 힘겨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공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매일신보』 학생란에 「추억」이라는 시가 처음 실리며 문학적 역량을 드러냈다.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모친이 염소를 팔아 마련해 준 7원을 가지고 상경하여 문학도였던 송영철(宋榮喆), 윤길구(尹吉九) 등과 기거하면서 떡 팔이, 막노동, 백화점 선전문 작성, 심지어는 매혈(賣血)까지 해가며 고학(苦學)을 하게 된다.
시인 조지훈을 흠모하여 입학한 혜화전문학교 불교과에서 정태용, 조영암, 이원섭 등과 함께 공부했다. 문학보다는 안정된 직장을 얻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법정학과 같이 출세에 도움이 되는 과에 입학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꾼 이유는, 바로 『문장』지에 발표된 조지훈의 「승무」를 읽은 다음이었다. 후일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오색 무지개 속에 감긴 사나이가 나를 황홀케 했는데, 그가 바로 지훈이었다. 나는 조지훈으로 인해 하필 취직길도 막히는 그 학과를 택했고 안 할 고생을 숱하게 했지만 여태껏 뉘우친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조지훈이 학교를 떠나자 본인도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징용을 피하려 목포시청, 해남황산면사무소 등에서 근무했다.
흔히 문학의 암흑기라 하는 한국전쟁기에 광주에서 순문예지를 표방한 『신문학』이 발행되었다. 『신문학』은 1951년 6월 1일 발간된 제1호를 시작으로 1951년 12월, 1952년 7월, 1953년 5월에 걸쳐 제4호까지 발간된 후 재정 부족 등을 이유로 폐간되었다. 목적성을 담보하지 않는 순문학을 지향했던 문예지로 당시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던 다형 김현승이 주간으로 참여하고 박용철의 미망인 임정희가 재정 후원하였다. 호남문학을 점검하고 정리하면서 호남문학의 거점역할을 하고자 출발하였으나 전국의 문인들이 참여함으로서 문예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작품 활동의 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에서 지니는 가치가 높다. 이동주는 『신문학』 창간 동인으로 「좁은 문(門)의 비가(悲歌)」, 「봉선화(鳳仙花)」, 「강강술레」, 「황토(黃土)밭엔 태양(太陽)도 독하다」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봉선화(鳳仙花)」는 이동주가 흠모해 마지않던 조지훈 시의 차분하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녹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동주는 동료 문인들에게 ‘일생 안주를 못하고’(서정주), ‘문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방랑객’(김봉호), ‘대문 밖만 나서면 표표히 떠돌아다니는 바람“(윤재근)으로 평가받곤 했다. 아무런 설명도 이유도 없이 집을 떠나 산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은 예사이고 부인과 어린 자녀들만 집에 두고 한 달에 20여일을 해남 두륜산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정에서는 그리 좋은 가장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는 전국을 떠돌며 자신만의 문학적 강직함을 굳혀갔다. 그 결과 그는 고전 정신과 토속적 서정의 추구로 순수 전통시의 계승과 발전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한 1950년대 대표 서정 시인이 되었다.
이동주는 슬하에 아들 우선과 딸 애정을 두었다. 특히 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하는데, 딸이 태어나자 평소 각별한 사이였던 다형 김현승을 찾아가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의논을 했다고 한다. 부인인 최미나 소설가의 본명인 ‘은례’의 ‘은(恩)’과 본인의 이름 뒷글자인 ‘주(柱)’를 합성한 ‘은주’라는 이름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애영’, ‘주은’, ‘애정’을 두고 일주일 내내 고민하다가 결국 ‘사랑 애(愛)’와 ‘결정 정(晶)’의 한자로 ‘애정’이라 지었다. ‘딸’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까워 ‘달’이라고 부르며 아꼈다는 딸 애영은 이동주의 문학적 기질을 이어받아 2002년 『책과 인생』 수필부문 당선, 2005년 『문학시대』 시부분 당선으로 등단하여 현재 시인의 길을 걷고 있다.
이동주는 서구시의 흐름이나 영향에 물들지 않고 오직 순수 전통 서정시를 지향해 온 시인으로 해방기의 혼란과 전쟁의 체험을 거치면서 서정적 전통을 유지했던 청록파(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의 시적 전통을 이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스스로 “나는 문학에 있어서만은 순수로 수절한 사람이다. 딴 분야를 담당했어도 그 길밖에 모르는 무능력자였을 것”이라고 할 만큼 순수 서정시를 고집해왔다. 일찍이 주지주의 평론가인 최재서를 비롯하여 김기림, 정지용 등이 보여준 1930년대 모더니즘적 경향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동주 등단 당시의 신인군들, 즉 김경린, 박인환, 조향,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등이 활동한 후반기 동인들의 작품세계를 비추어보면 그의 대표작 「황혼」, 「혼야」, 「새댁」 등은 분명 모더니즘적 요소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해방 이후 현대시사 위에 독자적인 분야를 형성하였다.
이동주는 그를 많은 아는 지인들에게 정인(情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부인인 소설가 최미나씨에 의하면 그는 ‘인정을 물 쓰듯 헤프게 쓰는’ 사람이었다. 새로 이사할 셋방 계약금을 들고 나가 그보다 딱한 사람에게 그냥 줘버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만은 경건하고 준엄했다. 낱말 하나, 글귀 한 줄에도 생명을 걸다시피 한 각고한 시인이었다. 「해녀」라는 시 한편을 쓰기 위해 원고료의 30배 이상이나 되는 비용을 들여 제주도를 세 차례나 다녀왔으며, 「산조」라는 시를 쓸 때는 가야금을 사서 직접 레슨을 받고는 작품을 완성한 후 헐값에 되팔기도 했다. 하나의 시어를 작품화하기 위해 시인은 늘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상황과 맥락에 맞는 적확한 단어, 그것을 낚기 위한 전략과 치밀함이 그의 작시(作詩) 태도였다.
그는 전통에 대한 집요한 애착과 시에 대한 분명한 장인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향토적인 감각과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감정과 정서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표현했다. 한국인의 고전적·토속적 정감을 남도가락에 실어 노래하는 한편 모국어의 전통적 맥락 속에서도 얼마든지 활달한 시상을 전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대표작 「강강술래」는 추석 한가위 둥근 달 아래에서 민속적 원무인 강강술래를 하는 무리들의 모습과 춤의 연행과정을 시각적인 회화성과 청각적인 음악성으로 적절히 조화시켜 그 아름다움과 삶의 애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향의 정서를 버무린 그의 음악성은 민요적 가락과 판소리 장단에 근거하고 있으며, 전라도적 기질에서 온 심성의 가락으로 단어, 문장, 어법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동주 문학의 바탕은 ‘한’이다. 그 한은 숙명과 대결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심오한 심경이며,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홀로 헤치고 나가야 할 슬픔이자 탄식이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이라는 고리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이고 삶을 해석하기 위해서도 한을 멀리 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이동주의 한은 욕망이 좌절 될 때 일어나는 일반적인 한과는 달리, 인간이라는 숙명적인 한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동주의 유년시절과도 연관이 있는데, 당시 지역 유지였던 그의 집에는 망국의 한을 토로하는 손님들이 많았고, 전국을 떠돌다 머무는 사람들로 사랑채가 늘 붐볐다고 한다. 학도가와 권학가를 들으며, 사랑채에 머물고 간 많은 사람들의 한스러운 노랫가락 속에서 그는 일찍이 민족의 한을 발견했다. 그러한 체험들이 문학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어 슬픔이라는 감성과 망국의 한이라는 시대적 아픔 속에서 감상적인 소년으로 자랐다.
그의 시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정한’이다. 정한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이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그는 ‘한’을 문학의 한 방법으로 여기며, 여기에 인위적 가식이나 수사를 최대한 억제하며 있는 사실 그대로의 자연적 묘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기저에 깊이 흐르는 한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가 생전에 남긴 시는 그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 미발표 작품까지를 모두 합한다고 해도 총 150여편에 불과하다.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44편의 작품을 제외 하고나면 『혼야』(1951), 『강강술래』(1955), 『산조』(1979), 『산조여록』(1980)에 수록된 작품이라야 고작 100편에 불과한 셈이며 그나마 재수록작품을 제외하면 92편에 머문다.
그는 시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로 실명소설 분야를 개척한 소설가로도 유명하다. 『현대문학』지에 몇 장 안 되는 어느 선배의 프로필을 쓴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읽히는 문장이 바로 편집부의 주문이었다.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으며 한때는 읽을거리를 메꾸지 못한 잡지사마다 그 글을 찾기도 했다. 이동주 본인이 존경해온 한국 문단의 대가 박종화, 박화성, 김영랑 등 유명 문인·예술인들의 개성과 특징에 픽션을 가미하여 인간적인 면모를 표현하였다. 그 원고들을 모아 후일 『빛에 싸인 군무(1979)』를 출간하였다. 그 외 수필집 『그 두려운 영원에서』(1982) 시론이나 평론적인 글 다섯 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