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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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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은 자신의 은둔생활을 철저히 자연 속에 몰입시킨다. 그가 이러한 자연속에서 자신의 세계로 조영한 곳이 수정동과 금쇄동이다.

고산문학의 주된 배경은 자연이다. 이중 어촌을 배경으로 한 것이 보길도에서 지었던 『어부사시사』 이고 산중인 임천(林泉)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 현산면 금쇄동에서 지었던 『산중신곡』『금쇄동기』 다.

[ 금쇄동에서 은거중에 쓴 문학작품 -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고산연보, 금쇄동집고, 금쇄동기 등... 다수의 문학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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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1651년 고산 선생이 보길도에서 은거생활을 할 때 지은 40수의 한글시조. 어부의 생활상을 춘, 하, 추, 동 사계절에 따라 각 10수씩 노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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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신곡 (山中新曲)
고산선생이 경상북도 영덕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해남에 돌아온 후 현산면 금쇄동에서 은거생활을 하며 56세에 완성한 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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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쇄동기 (金鎖洞記)
고산은 54세 때인 1640년 금쇄동을 발견하고 이곳의 지형과 산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으며 자연 22곳에 직접 이름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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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고산선생이 금쇄동에서 은거생활 할 때 도연명, 이백, 백거이 등 중국의 여러 시인들의 시구를 모아 첩으로 묶은 것.

고산은 크게 천연의 순수자연과 순수자연에 인공을 가한 조형자연을 선호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고산이 보길도에서 부용동원림을 조영하고 현산면에 금쇄동원림, 수정동원림을 경영한 것은 이러한 조형자연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산의 대표적인 『산중신곡』 은 이곳 금쇄동과 수정동 그리고 문소동 등에서 원림을 경영하며 산거생활의 흥취를 노래한 것이어서 고산의 중요한 문학처이다.

고산이 처음 은둔처로 정한 수정동은 현산면 만안리 만안저수지 윗쪽 골짜기에 위치한 계곡이다. 현재 채석장이 있는 곳을 지나 조그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비가 올 때나 흐르는 실개천이 나오고 이 실개천을 이용하여 고산이 조영한 수정동 유적이 나온다. 이곳은 고산이 기유년 53세 되던 2월 경상도 영덕의 귀양살이에서 풀리어 해남 연동의 종가에 돌아온 후 산거생활(山居生活)을 위해 처음 찾은 곳이다. 이곳의 좁은 계곡을 따라 오르면 양쪽에 허물어진 축대가 있어 정자나 집을 짓기 위해 쌓아올린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병풍바위 바로 아래에는 축대중 가장 큰 규모인 높이 약 3m, 길이 10m 가량의 정자 터가 있으며 여기저기 기와 파편들이 흩어져 있어 기와를 얹은 정자 터가 아니었나 추측케 한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자연의 일부는 높이 약 10m, 길이 50m 가량의 병품바위다.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 병풍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비폭이 되어 흐르고 있다. 비가오지 않을 때는 그 수량이 적어 그 맛을 느끼기 어렵지만 비가 오면 병풍바위에서 떨어지는 비폭을 바라보며 시상에 잠겼을 고산을 생각하면 그의 낭만적인 조영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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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폭에서 부근 마을사람들이 유두날 물을 맞았다고 하며 물을 맞을 때 마음씨가 나쁜 사람은 구렁이가 물을 막아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병풍바위 왼편으로 따라 올라가면 조그마한 동굴이 나온다. 천연굴로 보이며 아주 옛날에는 호랑이도 살았다고 한다. 이 동굴은 산중신곡의 ‘일모요日暮謠’에 나오는 ‘아희야 범 무서운데 밖에 나다니지 말아라’고 한 고산의 심정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위쪽에는 무성한 덤불 숲 속에 축대를 쌓아 만든 연못이 있다. 이곳에서는 금쇄동이나 보길도에 비해 그 조영된 규모나 모습이 작지만 아기자기한 정원 같은 느낌이 든다. 고산은 수정동에서 다시 문소동을 찾아 정사(精舍)를 짓고 왕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꿈으로 인해 발견한 곳이 금쇄동이다. 고산은 경진년(54세)에 천연의 금쇄동을 발견하며 금쇄석궤(金鎖錫櫃)를 얻는 꿈을 꾸고 며칠이 안되어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기 때문에 금쇄동이라 하였다 한다.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감춰온 이곳, 그 누가 알랴 선경인 줄을 깎아 지르나니 신설굴이요 에워 두르나니 산과 바다로다. 뛰는 토끼 나는 가마귀 산봉우리 넘나들고 올라와 보니 전날밤의 꿈과 같음을 알겠구나. 옥황상제께서는 무슨 공으로 내게 석궤(錫櫃)를 주시는고」

이 한시는 고산이 금쇄동을 발견하고 지은 『초득금쇄동(初得金鎖洞)』이란 작품으로 이곳을 얻은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고산이 찾아낸 금쇄동은 현산면 구시리 산 181번지에 있는 270~290m의 산 정상부에 있다. 서북쪽을 제외하고는 가파르고 험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보통 ‘산성안’ 이라고 부른다. 금쇄동 안으로 들어가는 계곡은 병풍산이 동·북쪽으로 길게 가로 놓여 있어서 약 4km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계곡에서 금쇄동이 있는 산을 올려다보면 그리 높지는 않으나 바위가 많고 경사가 심해서 오르기 어려운 산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 산의 정상부에 오르면 약 3만여 평의 분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 분지를 감싸고 약 1.5km 가량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며 1656년 유형원이 만든 「동국여지지」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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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쇄동은 해남현의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산세는 면곡(面曲)하고 험령(險嶺)을 넘으면 그 위에 고성지(古城址)가 있다. 인조 때 현사람 윤선도가 산의 높은 곳을 금쇄라고 이름 지었다.」

이 산의 정상에서는 두륜산과 달마산은 물론이고 멀리 월출산과 서남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모습과 기암절벽이 기묘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고산이 이곳을 얻고 쓴 시에 ‘선경仙境’이라 표현한 마음이 이해가 간다. 고산은 그의 수필집인「금쇄동기」에서 금쇄동에 관한 산수경관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금쇄동은 문소동 동쪽의 제일봉 위에 있다. 심히 높아서 해와 달을 가까이 하고 바람과 비를 내려다 볼만한 곳이다. 금쇄동의 하늘은 환하게 밝으면서 붉은 기운이 그윽하고 산수의 경치는 진귀하면서 아름답다. 산의 후면은 점차 험해지다 위에는 심하게 험하지 않고 멀고 깊어서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다. 금쇄동의 계곡입구에 도달하면 점로(店路)는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산세가 험하고 급해서 그 아래로 왕래하면 단지 단애(丹崖)와 취벽(翠壁)만 보이고 높이 솟은 뾰족뾰족한 산봉우리 같고, 저녁놀이 서린 첩첩한 산봉우리 같아서 골짜기가 거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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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쇄동에 위치한 고산 윤선도 묘지

고산은 이곳 금쇄동에 회심당, 불원요, 휘수정, 교의제 등을 짓고 연못을 파서 연꽃과 고기를 길렀다는 기록이「고산연보」고산의 54세 때 기록에 나온다. 이러한 조형자연 속에서 고산은 산중신곡과 같은 뛰어난 작품을 지을 수 있었다. 고산 연보를 비롯한 산중신곡이나 금쇄동기를 통해 금쇄동의 여러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금쇄동을 오르며 그가 차례대로 명명한 불차, 하휴대, 기구대, 중휴대등 20여개에 이르는 지명과 그중 금쇄동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월출암에서 내려다보이는 본가 연동은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송순이 담양의 지곡리에 있는 성산동의 식영정과 소쇄원, 광주 충효리의 환벽당(環碧堂)을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하여 명구로 기렸듯이 이곳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을 삼승(三勝)이라 할 수 있다. 이곳 금쇄동에는 고산 신도비와 고산 제각이 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하는 고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