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콘:university} 공재윤두서고택 >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공재윤두서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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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면 백포 마을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후기 대표적인 화가였던 공재 윤두서의 후손들이 자자 일촌을 이룬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해남윤씨 집안의 영화를 보여주듯 공재의 후손들이 살았던 수백년 된 고가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어 옛 전통 마을의 정취가 짙게 남아 있다. 백포마을은 현재 50여호의 가구에 해남윤씨와 밀양박씨, 김해김씨가 살고 있지만 해방되던 무렵까지만 해도 대부분 해남윤씨였다고 한다.

백포 마을의 들머리에 서면 이들 고택들로 인해 예전에 소위 뼈대 있는 집안들이 세거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공재는 백포 마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공재의 넷째 아들인 윤덕훈(尹德熏 1694~1757)이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그 후손들이 퍼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산면 백포는 공재의 삶의 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때 공재는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그가 주민들의 구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백포마을은 고가들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공재의 후손들인 해남윤씨 후손들의 집이다. 때문에 전통 고가마을의 분위기가 짙게 풍겨져 온다. 현재 남아있는 고가들은 쓰임에 따라 조금 변형이 되어 있기도 하지만 옛 고가의 모습들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아직도 고가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산면 백포에 있는 윤두서 고택(중요민속자료 232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연동 녹우당과 비교된다. 종가인 녹우당의 위세와 비교될 수는 없으나 건축의 측면에서 비슷한 공통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백포마을 뒤의 망부산은 연동의 덕음산과 비슷한 서향 형세로 마을 뒤를 받치고 있어 지형에서도 비슷한 점을 느낄 수 있다. 가장 공통적인 부분은 전체적인 집 구조가 녹우당과 비슷한 ‘ㅁ’자 형태를 유지한 것이다. 현재는 안채의 서쪽 한편이 헐리고 ‘ㄷ’자 구조를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ㅁ’자 구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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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윤두서고택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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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윤두서고택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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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윤두서고택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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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윤두서고택 풍경

이곳은 48칸 규모의 집이였다고 하나 현재는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채, 곳간채, 헛간 그리고 사당만 남아 있다. 또한 사랑채 앞마당에 작은 인공 연못이 있었고 사당 옆에는 별묘사당도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공재 고택은 일제하 무렵에 불이나 원형을 많이 잃어 버렸다고 하는데 그 전까지는 고가들이 빽빽히 둘러쳐진 대 전택이었다.

공재 고택은 안채의 남쪽 중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현재 안쪽 중간문은 구조가 변경된 상태인데 이곳을 통해 안으로 진입하면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북쪽편에 나있는 부엌을 시작으로 안방, 그리고 강당형식의 3간 대청이 나온다. 그 옆으로 방, 곳간 등이 이어져 있고 부엌 뒷편으로는 헛간이 있다. 이 고택의 안채 상량도리 밑 장여에는 (龜 庚戌後百四十二年辛未八月十日?時重修坐卯向酉龍) 라는 중수 상량문이 있다. 이를 통해 이 집은 1670년(경술년)에 처음 지어졌음을 알 수 있고, 142년 후인 1811년(신미년) 8월에 크게 고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670년(현종11)은 공재(1668~1715)의 생존시로 이 연도로 따진다면 공재의 아주 어린 시절에 해당한다. 또 안채의 내림새 기와에는「同治十年辛未九月重修」라는 명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집을 크게 고친지 약 60년 후인 신미년(1871년) 9월에 지붕을 다시 고쳤다고 쓰여 있다. 안채는 ‘ㄷ’자형의 용마루에 작은 합각이 있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동쪽 광의 남면 끝 지중은 우진각으로 되어 있다.

백포 마을 앞으로는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지금은 간척지가 넓어졌지만 예전에는 마을과 바다가 훨씬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형적인 영향으로 인해 공재도 이곳에서 오랫동안 기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연적인 특성 때문에 해풍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덮은 형식을 하고 있다. 또한 처마는 홑처마 지붕으로 연목만 걸고 있고, 대청마루 위의 가구는 자연스럽게 약간 굽은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구성하여 장여와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사당은 안채의 오른쪽 윗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 바로 곁에는 별묘사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