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콘:university} 녹우당 >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녹우당

사랑채이미지

해남읍 연동 고산유적지에는 덕음산을 뒤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중에 하나로 꼽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고택 녹우당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전통고가로 잘 알려져 있다.

덕음산을 뒤로하고 그 줄기인 성매산, 옥녀봉, 호산을 잇고 들어서 있는 연동 녹우당은 흔히 풍수지리의 산서(山書)에서 말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짜여진 최고의 명당자리로 손꼽히고 있다. 이 터는 고산의 5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자리를 잡았다고 하며 현재 고산 윤선도의 14대손인 윤형식 종손이 살고 있다.

[ 눅우당 자연환경 - 입구송림 숲, 자연풍수의 원리에 의해 조성된 백련지, 500년이상된 은행나무, 어초은묘 등이 유적지내에 있습니다.]

녹우당입구송림이미지
녹우당 - 입구송림
녹우당백련지이미지
녹우당 - 백련지
녹우당은행나무이미지
녹우당 - 은행나무
녹우당어초은묘이미지
녹우당 - 어초은묘

녹우당이 있는 연동 마을은 예전에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공적으로 조영한 연못이 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백련동(白蓮洞)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연동이라 부르고 있다.

백련동의 형국은 덕음산을 주봉으로 배산(背山)하고 좌우에 그 지맥이 안아싸고 있는 듯한 형상일 뿐 만 아니라 동쪽 계곡에서 원류된 작은 개울이 마을 앞 들판을 흘러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말매봉, 문필봉)이 원경으로 펼쳐져 있어 풍수가 수려한 형국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국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남윤씨가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고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그 전통을 잇고 있다.

[ 녹우당 건축물 - 사랑채, 안채, 행랑채, 안채 환기용 구조물 ]

녹우당사랑채이미지
녹우당 - 사랑채
사랑채는 녹우당에서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사랑채는 사대부가에서 남자들의 중심 공간이라 할 수 있는데, 공재 윤두서의 절친한 친구였던 옥동 이서가 써준 녹우당(綠雨堂) 현판이 붙어 있어 더욱 상징성을 띠게 한다.
녹우당안채이미지
녹우당 - 안채
안채는 현재 종손이 거처하고 있는 곳이다. 녹우당은 전체적으로 'ㅁ'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으나 사랑채 옆으로 들어서면서 'ㄷ'자 형으로 자리 잡고있다. 건물은 서쪽으로 중앙에 3칸 대청을 두고 좌 우 아래로 방과 부엌, 창고 등을 적절히 배치하고 있다.
녹우당행랑채이미지
녹우당 - 행랑채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솟을 대문의 좌우로 행랑채가 'ㄱ'자형과 우측 아래쪽에 건립된 'ㅡ'자형의 2채가 있다. 솟을 대문을 사이로 방과 곳간, 마굿간, 부엌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녹우당안채환기용구조물이미지
녹우당 - 안채 환기용 구조물
안채의 특징적인 것은 안방의 아래쪽 부엌과 건너방 부엌 상부에 설치한 솟을지붕 형태의 환기용 구조물이다. 우리나라 전통가옥에서는 흔치 않은 구조물이다.

늙은 은행나무 옆으로 난 높다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녹우당 사랑채가 나온다. 이곳의 가장 상직적인 건축물이다. 녹우당은 고산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 윤선도는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다. 고산은 82세 되던 1669년 수원에 있던 집을 뱃길로 옮겨와 다시 복원하여 지었다고 전한다.

본래 호남지역의 건축양식은 보통 'ㅡ'자형 집이거나 'ㄱ' 자형인데 녹우당은 서울이나 중부지방 양반가와 같은 구조인 'ㅁ'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때 아흔 아홉 칸에 달하던 녹우당 고택은 현재 55칸 정도만 남아 있다

녹우당은 우리나라 양반사대부가의 고택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녹우당 하면 고택 전체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나, 녹우당은 이 집의 사랑채를 말한다. 이 건물이 들어섬으로 인해 전체적인 모습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녹우당 현판 옥당이서글귀이미지
녹우당 현판 - 옥동 이서 작품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써준것으로 이집의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현재 사랑채 현판으로 걸려있는 '녹우당' 이라는 당호는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1662~1723)가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을 써준 것으로 이때부터 이집의 공식적인 명칭이 됐다.

이곳 녹우당은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문예부흥이 이곳 녹우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녹우당의 건축역사는 고산 윤선도의 4대조이자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시조가 된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이 백련동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이 집의 역사와 건축형태는 지금까지 장구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중건을 하거나 보수 등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을 이어오다 지금 녹우당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현재 녹우당의 영역 속에 있는 주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과 좌측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초은 추원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