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1587
- 1세6월 22일 한성부 연화방,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윤유심과 어머니 순흥 안씨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 호는 고산 또는 해옹, 시호는 충헌
1594
- 8세큰집 (작은 아버지인 관찰공 윤유기)에 양자로 들어가 종손이 되어 가문을 이음
1603
- 17세남원 윤씨(판서 윤돈의 딸)와 결혼. 진사 초시에 입격
1987
- 12국보 제 240호 『공재 윤두서자화상』문화재 지정
1612
- 26세진사시에 급제. 9월 25일 차남 윤의미 출생. 12월 28일 생부 부정공 윤유심(향년 62세)의 상을 당함
1616
- 30세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올림. 이로 인해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
1623
- 37세4월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어 상경. 7월 사직하고 전라도 해남으로 감. 8월 별시 초시에 입격
1628
- 42세봄에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 3월 이조판서 계곡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로 임명
1629
- 43세12월 공조좌랑에 임명되고 특명에 의해 사부를 겸임
1633
- 47세증광향해별시 (增廣鄕解別試)에 장원으로 급제. 예조정랑에 임명
1637
- 51세제주도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이를 피하다가 산수가 수려한 완도 보길도를 발견. 그곳의 황원포에 내려 터를 닦아 부용동이라 명명하고, 낙서재를 짓고 살았음
1638
- 52세병자호란이 일어났던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임금께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 북도 영덕에 유배. 4남 윤순미 출생
1640
- 54세봄에 해남의 금쇄동에서 『금쇄동기』를 지음
1642
- 56세해남의 수정동과 금쇄동에서 『산중신곡』19수 완성
1645
- 59세『산중속신곡』2수 지음
1651
- 65세가을에 『어부사시사』40수를 지음
1660
- 74세효종의 장례 당시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삼년설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림. 겨울에『예설』2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논함. 그로 인하여 삼수로 유배
1665
- 79세3월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6월에 도착, 백운산 아래 옥룡동에 거처
1671
- 85세6월 11일 부용동 낙서재에서 세상을 떠남. 9월 22일 해남군 현산면 문소동에 묻힘
1672
- 12월 현종이 고산의 직첩을 돌려줄 것을 명함. 1675년 2월 이조 판서에 추증
1678
- 특명으로 충헌이라는 시호를 하사. 위신 봉상왈충 박문다능왈헌 이라는 뜻을 담아 내린 시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