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문학의 흐름
해남 시문학의 태동
고려 이전까지 해남은 유교적 통치가 미치지 않는 변방의 오지였다. 두륜산 일대에 대흥사가 창건되는 등 불교문화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고, 해상세력과 관련있는 무인들이 포구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지배를 행사하고 있었다. 대몽항전기에 진도로 본거지를 옮겨온 삼별초와 그 후 해안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의 영향 또한 무인의 지배를 견고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해남 일대에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해남 정씨 일가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걸쳐 대대로 호장(戶長)직을 세습해오고 있었다. 당시 해남 정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가장 먼저 나올 만큼 막강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후일에는 족보도 끊기고 그나마 남은 혈족들은 초계 정씨로 본관을 바꾸기에 이르는데, 이 배경에는 남녀균분상속제가 한 몫을 하였다. 직계 자손을 잇지 못한 상황에서 딸들이 재산을 가지고 출가하여 해남 정씨의 집안은 점점 기울고 대신 그 사위들이 덕을 많이 보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해남에 최초로 시학(詩學)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해남 시문학의 비조(鼻祖)라 불리는 금남 최부다. 그는 해남 정씨 가문의 사위가 되어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임우리(林遇利), 유계린(柳桂隣) 등 제자를 길러내며 해남에 문풍(文風)을 몰고 왔다.
어초은 윤효정(尹孝貞)은 해남 정씨 호장 정귀영의 사위가 되어 재산을 물려받았다. 최부와는 사촌 동서지간이었지만 나이와 학문 차이가 커서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다. 처가 덕에 부를 축적하게 된 윤효정은 이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그의 세 아들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이름을 알렸다. 아들 중 특히 시문학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이는 귤정 윤구다. 윤효정은 균분상속으로 기울어버린 처가를 반면교사로 삼아 재산을 종가에서 대대로 물려받게 하여 가문을 키우고 후일 종가의 보살핌 속에 큰 문인들이 나타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임우리는 전북 진안 현감을 지낸 임수(林秀)의 셋째아들로, 그의 형 임우형(林遇亨)이 사망하자 형의 다섯 아들을 돌보며 직접 공부를 가르쳤다. 임우리의 가르침을 받은 다섯 형제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호남 시학의 스승이라 불리는 석천 임억령이다.
유계린은 순천에서 나고 자라며 김종직의 문하인 김굉필에게서 공부하였다. 해남으로 와 최부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의 딸과 혼인하며 해남의 유력한 향족과 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김굉필과 최부 등 두 스승이 참형을 당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해남에 은거하며 호를 성은(成隱)이라 지었다. 대신 두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여 문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유성춘과 유희춘이다.
해남 시문학의 부흥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에는 철학과 문학의 꽃이 활짝 피었다. 영남 내륙에는 퇴계 이황을 필두로 성리학이 뿌리를 내렸으며, 호남에서는 광주호 주변에 자리한 정자 아래에서 가사문학이 꽃을 피웠다. 조선 중기 담양을 무대로 한 가사문학의 중심에는 바로 해남 출신의 시인들이 버티고 있었다. 석천 임억령의 뒤를 이어 미암 유희춘이 남도의 시심(詩心)을 읊었다. 미암 유희춘의 아내인 덕봉 송씨는 여성시인으로서 독보적인 세계를 열며 해남 시맥의 초석을 다졌다. 장흥에서 건너온 옥봉 백광훈도 해남에 새로운 시문학을 몰고 왔다.
그리고 마침내 17세기에 이르러 고산 윤선도(尹善道)라는 출중한 시인이 등장하며 해남은 조선시대 시문학의 성지가 된다. 윤선도는 서울에서 태어나 8세가 되던 해에 종가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윤씨의 대종을 이었다. 윤선도가 지은『어부사시사』,『오우가』등은 한국문학사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대표 작품으로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鄭澈)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러한 윤선도의 문예정신은 증손인 공재 윤두서(尹斗緖)에게 이어졌는데,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윤두서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조선시대 풍속화의 길을 열었다. 윤두서 이후에는 다성 초의선사(草衣禪師)가 등장하여 시맥을 이었다. 본래 시보다는 차(茶)로 널리 알려진 선승이지만 실제로 많은 시를 후대에 남겼으며 그의 유명한 저서 『동다송』 역시 시의 형식으로 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소치 허련(許鍊)이 찾아와 시와 글씨와 그림을 배우고 돌아갔을 정도로 그 수준이 높았으며『일지암시고』,『초의시고』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해남 시문학의 전환
조선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사회전체가 사상적 혼란을 겪으며 한시의 전통이 힘을 잃어갔다. 시문 작성 능력으로 사람을 뽑던 과거장이 온갖 부정과 비리로 얼룩지던 시대상도 한 몫을 차지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실사구시의 학풍이 새롭게 불어오고 문학에도 새 바람이 불어 전통적인 시문학 대신 산문이나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가 대중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서사와 더불어 회화가 부흥하며 공재 윤두서가 조선후기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으며 다성으로 불리는 초의선사가 등장하여 은은한 차 향기 속에서 독창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이며 조선후기 해남의 시맥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의 혼란을 거쳐 이동주, 박성룡, 김남주, 고정희 등 현대 시인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해남 시문학의 전통은 전통 한시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